[풍수여행2] 매헌 윤봉길 의사 덕산 생가와 효창원 묘소를 가다
[풍수여행2] 매헌 윤봉길 의사 덕산 생가와 효창원 묘소를 가다
  • 정정수 기자
  • 승인 2004.03.09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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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서 폭발한 항일 의거 ... 산천기운이‘志士의 길’열다
일제시대 가장 어려웠던 때가 1930년대이다. 유관순의 아우내 3‧1만세 시위이후 해외독립투쟁은 간간이 쾌보를 전해왔지만 국내에서의 활동은 일경의 감시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32년 일제가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과의 전쟁에 들어가자 국내외의 시각은 비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때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현재 명칭은 노신공원)에서 불꽃처럼 폭발한 윤봉길(尹奉吉)의거는 한민족에게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쾌거였다. 그의 의거는 꺼져가는 자주독립 불꽃에 기름을 부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했다.

장개석“중국인보다 낫다”찬사

당시 장개석 중국총통은 “중국군 100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한국의 청년이 해냈다. 윤봉길 의사야 말로 우리 4억 중국인보다 낫다”고 찬사를 보냈다. 장총통은 이 사건으로 한국의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고 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문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해 12월 일본 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한을 품고 떠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0여년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본에 있던 박열 동지에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분 열사의 유골을 모셔오게 하고…”
김구 선생이 ‘3인의 의사’ 유해를 일본서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들은 백범일지에 쓰인대로 부산에 도착, 수 만명의 태극기환영을 받으며 서울로 돌아온다. 국민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김구선생이 잡아놓은 효창공원 임정요원 묘역에 안장된다. 백범은 젊은 시절에 배운 풍수지리 실력을 발휘하여 ‘좋은 터’를 골라놓은 것이다. 효창공원은 연세대 주산인 서울 안산에서 뻗어내려 서강으로 가는 도중에 효창공원 쪽에 한자리를 만든다. 물론 이 자리는 본줄기가 마포를 향하여 계속 흘러가는데다 주택이 밀집하여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산이다.
큰 기운을 형성하진 못하지만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다. 김구선생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명당 한가운데에 안중근 의사 자리를 남겨놓고 그 앞에 윤봉길 의사 등 3인의 항일열사가 함께 자리하도록 배려해놓았다. 이 자리는 천안 출신인 이동녕 선생과 김구 임정주석 묘소 사이로 뻗어내린 중간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어 오늘도 이곳을 찾는 국민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19세때 야학 열고 농촌 계몽운동

#그림1왼쪽#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는 호가 매헌(梅軒)이며, 윤황(尹璜)의 장남으로 예산군 덕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세에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때 기미년 항일시위에 참가, 자퇴를 하게 되고 결국 독학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에 매곡(梅谷) 성주록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게 된다. 15세에 천재 소리를 들은 매헌은 19세가 되자 성선생으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선생은 자신의 호인 매곡의 매자와 성삼문의 호 매죽헌에서 헌자를 따 ‘매헌’이라는 호를 지어준다(성삼문의 생가는 덕산에서 멀지않은 홍북면 갈산리에 있다).
학문이 뛰어난 매헌 윤봉길은 19세에 야학회(夜學會)를 세워 지방의 청소년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그는 ‘농민독본’이라는 야학교재까지 직접 만들어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아래에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 자립이 필요함을 깨닫고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양계와 양돈 사업을 벌였다. 21~22세 때는 민족정신 앙양과 농촌 문화 계몽을 위하여 독서회(讀書會)와 부흥원을 창설하고,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민의 단결과 애국 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매헌의 계몽 활동은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으로 비춰져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고향에서의 노력도 일제감시치하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23세 때인 1930년 봄, 그는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 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이라는 비장하고 처절한 글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오른다.

백범 ‘한인애국단’ 들어가 거사

매헌은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해로 갔다. 31년 상해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의 일을 하다가 김구(金九) 선생이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들어갔다. 1932년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일(天長日)과 '상해 사변 전승 기념식'이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리자, 김구 선생에게서 받은 도시락 폭탄을 가지고 잠입하여 상해파견군 시라까와(白川義則)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당시 상해에 거주하는 일본군 요인들을 살해하는 의거(義擧)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매헌은 현장에서 붙잡혀 오오사카(大阪)로 이송되었고, 군법 회의를 거쳐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형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꽃다운 25세였다. 이 사건은 당시 침체되었던 독립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일으켰고, 우리 민족의 불굴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계기가 되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고 말하여진다. 하지만 누구나 시대를 이끄는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고 자란 산천이 함께 어울려야 가능하다는 것이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예산에서 덕산에 이르는 길은 막힘이 없는 시원한 평야지대다. 농민들이 한없이 평화로운 활을 구가할 수 있는 풍요의 들판이다. 작은 야산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가야산과 덕숭산 용봉산을 만나기까지는 툭 터진 평야지대다. 그러다가 평야가 끝나면 갑자기 큰 산이 나타나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회룡고조의 터에 자리한 생가

사적지로 지정된 윤의사의 생가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沐溪)라 불리는 마을에 있다.
목바리 마을은 가야산과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하여 대치천(大峙川)변에 삼각주를 이루고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서 내려오는 시내와 합해져 온천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작은 시내가 만든 삼각주에 윤봉길의사의 생가인 광현당(光顯堂)이 있다. 따라서 생가는 지대가 낮은 개천가에 자리잡아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장풍이 잘 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곳엔 증조부인 윤재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4대째에 윤의사가 태어났다. 광현당은 사방으로 물이 흐르는 가운데 터를 잡았다. 매헌은 이곳을 “왜놈은 한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는 땅이라고 하여 스스로 '한반도의 가운데 섬(島中島)'이라 불렀다고 한다. 풍수에서 사방이 물이고 그 가운데에 떠 있는 터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부른다. 풍수적인 시각으로 보면 ‘연꽃은 꽃도 열매도 구비된 원만한 꽃이다. 이 연꽃은 물 밖 또는 물 속에 있어서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수면에 뜰 때에야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며 향기를 피운다. 따라서 자손들이 모두 원만하고 또한 고귀하고 화려한 생할을 한다’라고 그 우아한 멋을 표현하고 있다. 속리산에서 흘러온 금북정맥이 청양에서 몸을 돌려 홍성에서 월산을 만들고 다시 그 맥이 덕숭산과 가야산으로 이어졌고 한 가지는 용봉산을 일으킨다. 이 용봉산의 한 가지가 수암산을 만들고 그 끝자락이 평지로 내려와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조산을 되돌아보는 형태)의 양택지에 윤의사의 집이 앉아있다. 오른 쪽에는 덕숭산이 붓끝처럼 생긴 세 개의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어 학자의 기운을 잉태하고 있다. 왼쪽에는 바위산인 수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고 주산인 가야산 원효봉은 신선같은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도인이나 학자의 배출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산의 기운을 놓고 풍수학인들은 “예와 도는 가야산의 기운을 받고 문필력은 덕숭산의 영향을 받았다. 또 절의는 수암산에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기가 지나치게 강하다”고 말한다. 이는 윤의사가 단순한 인물이 아닌 산천의 기운이 뭉쳐진 ‘지사’의 모습이며 그러한 올곧은 자세는 주변의 기운을 받고 그 영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대의 앞에 과감히 자신의 몸을 던지는 그의 지사적인 자세는 충과 의와 기를 키워준 덕산 주변의 기운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풍수학인들의 입장에서 생가 왼쪽 청룡 쪽에 위치한 수암산의 강한 기가 안채를 향해 너무 강하게 마주쳐 내려오는 것이 장남에게 위해를 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기운이 없었다면 한이 서린 일제시대에 ‘쾌거의 한페이지’를 누가 장식할 수 있었겠는가. 한 인간의 평안함과 역사적인 행동을 두고 풍수학적인 해석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생가와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유품들

생가(生家)인 광현당과 4살부터 독립 운동을 위해 떠나기까지 살았던 저한당((抵韓當 ․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매헌이 지었다)이 있다. 초가인 저한당엔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의거기념탑과 동상이 있고, 유물관에는 총 30종 56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의거 직전 상해에서 김구와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 정표로 받았다는 회중시계, 당시 소지했던 중국 화폐와 지갑, 도장, 안경집, 형틀 등이 있다.
월진회 창립취지서는 1927년 윤봉길이 부흥원에서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월진회를 창립할 때에 그 뜻을 밝힌 12매의 글로서 붓으로 쓰여져 있다.
농민구제와 농민부흥의 뜻을 밝혀 민족정신과 자주자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는 농민독본은 본래 3권이었으나 현재 2권만이 남아 있다.
형틀대는 길이 160cm정도로 윤봉길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그가 사형을 당한 일본 가나사와 교외 미코우시 공병작업장에서 사용하였던 것이라 전한다.
사당에 있는 매헌의 영정은 양복을 입고 머리는 상투를 잘라 짧게 깎았으나 조금 긴 듯하며, 꼭 다문 입술에서는 불굴의 의지와 패기가 느껴진다.
윤봉길이 생전에 사용했던 일괄유품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었으며 모두 13종 68점이다. 그 가운데 10종은 충의사 기념관에 보관중이며, 2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머지 1종은 서울 윤남의(尹南儀) 집에 소장되어 있다. 충의사기념관에 소장된 10종의 유물은 윤봉길이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킬 당시의 소지품들이다.

윤의사가 사용한 물통과 도시락 폭탄

#그림2중앙#윤의사는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한 교포 집에서 김구 단장과 함께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1개를 받아 어깨에 메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또한 자기가 가진 새 시계를 백범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 구 선생에게 돌려준 후 식장으로 향했다.
윤의사는 기념식전의 마무리 단계로 일본 국가의 제창이 끝날 무렵, 확성기의 성능이 나빠 수선하기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었던 물통형 폭탄을 내려 발화용 끈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식단 가까이 돌진했다.
그리고 왼편 뒤쪽에서 단상을 향해 이것을 던져 연단 중앙에 명중시켰다.
물통형 폭탄은 130냥이나 되는 무게를 가진 대형 군용물병으로 그 안에는 강렬한 폭발약과 부서진 백철편(白鐵片)이 장치되었고, 외면은 3분(分) 두께의 강철로 싼 위에 다시 옷감으로 쌌고, 던질 때에는 조그만 뚜껑을 열고 뾰족한 끝을 좀 잡아당기면 그 끝에서 마찰력이 생겨서 자연적으로 발화될 수 있고, 또 이 물병식 폭탄은 긴 끈이 달리어서 원심력을 이용할 수 있는 까닭으로 목적하는 원근관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극히 정확하게 표적에 맞는 폭탄이라고 한다.
손에 든 도시락은 변당(辯當이란 일본인들이 밥을 담는 장방형의 흰 쇠로 만든 그릇)이다. 그 안에도 역시 폭탄을 장치했다.

윤의사 애국정신 기리는 매헌 문화재

윤봉길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제31회 매헌문화제 및 윤 의사 의거 72주년 다례행사'가 올해도 4월 말 예산 충의사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도 월진회와 덕산 번영회 등 38개 단체가 참여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등 주민 화합 문화관광축제로 진행된다.
해마다 열리는 행사로는 ▲첫날 -내포제 시조 경창대회, 예덕상무사 공문제, 무당굿 및매헌농악단 공연, 불꽃놀이 등이 ▲둘째 날- 도교육감 배 글 짓기, 사생대회,윤봉길 의사 판소리 공연, 전국 연날리기대회, 운봉 가요제 및 축하공연 등이 열린다.
▲마지막 날- 윤 의사 다례행사, 예산군 씨름왕전, 윷놀이대회, 상두놀이 및 보부상 가장행렬, 극단 우금치의 보부상 난전놀이, 짚신삼기 등 5개 종목 민속놀이 시범 공연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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