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여행] 고양시 대자산 최영 장군묘소를 가다
[풍수여행] 고양시 대자산 최영 장군묘소를 가다
  • 정정수 기자
  • 승인 2004.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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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없으면 내 묘에 풀나지 않을것' 최영의 '붉은 무덤'
최영 장군은 “내가 죄 없음은 하늘이 알고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 고려 명장 최영 장군. 교과서에까지 적분(赤墳·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무덤)내용이 실렸던 화제의 최영장군 묘소를 찾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여야가 대선자금, 경선자금을 싸고 자기얼굴에 묻은 때는 보이지 않는지 남의 흠 찾기에 바쁘다. 대통령 사돈이 순식간에 몇백억의 자금을 모으는 세상이다. 이럴 때 ‘황금 보기를 돌보듯이’살다간 최영 장군 같은 청렴한 공직자는 없을까. 쓰러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최영장군. 청렴결백하고 사리사욕이 없기로 유명했던 최영장군. 그의 묘소를 찾아 오늘의 세태를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최영장군은 우왕때 팔도도통사가 되어 만주대륙을 정벌하려했다가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으로 꿈을 펴지 못하고 날개를 접었다. 이성계는 자기의 야망을 펼치는 데 장애가 되는 최영장군을 제거하고 만다. 마땅한 죄목이 없어 붙인 죄목이 ‘나라를 위해 세운 공은 크나 대국(명나라)에 죄를 졌으니 죽여야 마땅하다’는 이해 못할 죄명이었다.
최영 장군은 “내가 죄 없음은 하늘이 알고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 고려 명장 최영 장군. 그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후 조선조 말까지 그의 묘소엔 정말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무덤위에 지금까지 풀이 나지 않는다(至今塚上不生草)’라고 쓰여 있어 조선 중기까지 ‘붉은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파란 잔디가 그의 묘소를 덮고 있는 것은 조선 왕조가 망한 뒤 그의 후손들이 묘소를 단장하면서 새 잔디를 입혔기 때문이다.
교과서에까지 적분(赤墳·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무덤)내용이 실렸던 화제의 최영장군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벽제화장장을 지나면 필리핀군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나온다. 그곳 삼거리에서 최영 장군 묘소 입구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1km쯤 들어가면 성령대군(誠寧大君:태종의 넷째아들) 사적지(事蹟地) 못미쳐 다시 안내표지가 나타난다. 그곳서 우회전하여 마을 앞쪽 개울을 따라 약5백m 정도 올라가면 최영장군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묘역에는 두개의 묘가 상하로 있는데 위쪽은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 묘이고 아래가 최영 장군과 부인의 합장묘이다. 최영 장군 묘의 주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온 끝자락인 대자산(大玆山)이다. 정상에서 뻗어나온 산줄기는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험한 기를 털어내고 순화시키면서 최영 장군 묘소 뒤 봉우리까지 기세있게 흘러온다. 흘러내려오며 좌측으로 한 능선을 뻗어 청룡(왼쪽 산줄기)을 만드는데 묘 앞을 완전히 감싸면서 백호 끝까지 감아 돈다.
백호(오른쪽 산줄기)는 함께 내려오면서 혈(穴·기운이 모인 자리)을 보호 해주나 너무 강하게 흐르는 청룡 세력에 밀려 혈을 제대로 끌어안아 주지 못하고 청룡을 따라간다. 그러나 수구가 좁은데다 물을 가로 막는 줄기가 여러 개 서 있어 내부의 생기를 보호해주므로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안정된 부를 누릴 수 있는 명당이다. 청룡으로 이루어진 안산이 가깝고 높기 때문에 혈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앞이 높으므로 조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남의 도움 없이 은둔하기에 좋은 장소다. 청룡이 혈을 완전하게 감싸 외부에 노출을 시키지 않아 풍수가들은 혈 이름을 회룡은산혈(回龍隱山穴)이라고 말한다. ‘숨어 있는 용혈’이란 뜻이다.
담장 뒤로 가보면 머리부분이 단단하게 뭉쳐 있지만 험한 바위가 많이 널려있어 안타깝다. 명당으로 흘러온 산줄기는 분명하고 기세있게 변화하며 내려오지만 옆이 골지고 패인점이 마음에 걸린다. 산줄기는 위에서 내려오면서 험한 기가 순화되어 혈이 가까워질수록 용은 부드러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곳은 반대로 내려갈수록 더 강하고 험하다. 아버지 묘와 최영장군 묘를 비교해보면 장군 묘가 비교적 깨끗하고 환하다. 이것은 머리부분 바위가 험하고 강하여 바로 밑에서는 혈을 만들 수 없으므로 더 앞으로 나가 살기를 털어내면서 힘이 응축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최영 장군 묘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비장감마저 드는 혈로 조선 왕조에 적개심을 품고 은둔하면서 지내온 후손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영은 철원의 옛 이름인 동주(東州) 최씨로 고려 충숙왕 3년(1316년) 사헌부 간관(諫官)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동주 최씨는 고려 때에 조선조의 영의정과 같은 문하시중을 3명, 정2품격인 평장사를 7명 배출하는 등 문무를 겸전한 명문이었다. 청백리로 유명했던 아버지 최원직은 최영이 16살 때 아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여겨라 <여당견금여석(汝當見金如石)>”는 역사에 남을 유훈을 남긴다. 최영은 아버지의 유훈처럼 명예를 초개같이 여기고 충과 의로 일생을 살았다. 당장 끼니를 이을 쌀이 없어도 전장에서 공로로 받은 상과 공신전을 국고에 반환하는가 하면 부하나 백성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기운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병서를 읽고 무술을 닦았다. 문관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무관으로 입신해 평생토록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확실치 않다. 동주 최씨이므로 철원의 옛 지명인 동주에서 낳았을 것 이라고 추측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사헌부 간관(諫官)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송도출생 일 것이라는 얘기, 홍성이라는 설 등이 전해오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게 아산 설화산 기슭 배방면 중리라는 설이다. 설화산 기슭에 있는 ‘맹씨 행단’이 원래 최영장군의 집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최영장군이 개경으로 영전해 가면서 절친한 사이였던 맹사성 할아버지인 맹유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맹사성이 최영장군의 손녀사위가 되었다는 점도 그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흥미 있는 사실이 또 한가지 있다. 최영장군 아버지가 최영에게 “황금 보기를 돌보는 것처럼 하라”고 할만큼 청백리였다는 점과 최영장군이 철저히 청백리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맹사성 정승이 황희정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청백리중의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청백리라는 점이다. 이는 땅의 기운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게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로 미루어 아산 설화산 기슭이 최영장군의 출생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최영장군은 35세 때 청년장교로 지금의 경기도인 양광도에서 왜구의 침략을 수차례 물리친 공로로 왕궁 근위대원으로 중앙에 발탁된다. 공민왕 원년(1352년)에 있었던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무명(武名)을 떨치기 시작, 2년 후인 39세 때 대장군인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이때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명나라는 힘이 약해진 원나라를 자주 공격하게 된다. 명나라 장수 장사성(張士誠)이 원(元)을 침공하자 원나라는 고려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출정하여 명군을 토벌하고 그 댓가로 원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영토를 되찾았다.
이때 최영은 명나라 군대와 맞붙어 싸우면서 그들의 실력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요동 일대엔 군대가 많이 배치돼 있지 않구나’하는 약점까지 확인, 고구려 옛 땅인 요동 정벌의 뜻을 품게 된다. 환갑의 나이에 출정,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은 최영의 용맹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전투였다. 우왕 2년(1376년) 왜구 수만명이 공주성을 함락하고 연산 개태사 승려들을 몰살시키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고려에선 원수 박인규장군이 맞섰으나 전사하였다. 61세 노장군인 최영이 우왕에게 출정을 주청하자 자신을 지켜주는 장군이 부재시 공민왕처럼 암살 당하지 않을까 우려한 왕은 나이 든 몸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무리라는 핑계를 대며 말렸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자 최영은 백발을 날리며 지금의 충남 부여인 홍산으로 출진, 맨 앞에 서서 분전하였다. 이 때 나무 위에 있던 적병이 활을 쏴 최영의 입술을 꿰뚫었다. 그러나 최영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화살을 뽑아내 그 화살로 나무 위에 있는 적병을 쓰러뜨리고 진격한다. 사기가 오른 장병들이 그의 뒤를 따라 3만의 왜구를 단번에 섬멸하는 대첩을 올렸다. 이 공로로 최영은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왕 14년(1388년) 73세의 최영은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 때 명(明)나라가 원을 쳐서 몽골 초원으로 쫓아내고 대륙의 주인행세를 한다. 명은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는가 하면 철령에서 요양까지 70여 개소에 그들의 군사 시설을 설치, 군대를 주둔하겠다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분노한 최영은 이성계와 정몽주 등의 반대를 누르고 우왕을 설득하여 요동정벌군을 일으켰다.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한 5만 원정군은 1388년 4월 서경을 출발하여 5월에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겁 많은 우왕이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출정하지 못하고 말았다. 총사령관인 최영이 진두지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장마가 시작되었다. 친명파인 이성계는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는 이유로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회군을 감행한다. 질풍같이 남하한 원정군은 개경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최영은 노약자들을 모아 급조한 군대로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이성계에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합포와 충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개성으로 압송당하여 참수 당하고 말았다.
최영이 처형당하자 온 백성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개성의 상인들은 문을 닫고 시장을 열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영 장군을 신장(神將)으로 섬기면서 이성계를 저주해온 것이 지금도 무속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무속인들은 2년에 한번씩 음력 3월 도당굿을 하고 전국의 무당이 모여 최영 장군의 제사를 지낸다. 굿이 끝난 다음에는 일명 성계육(成桂肉)이라고 불리는 돼지고기를 씹어 먹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원통하게 죽은 최영장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를 죽인 이성계를 저주하기위해 돼지고기를 이성계의 살이라고 생각하며 씹었다고 한다.
태조 5년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공(武愍公)이라는 시호를 주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제전답(祭田畓)을 봉전하는 등 복권을 허락하였으나 그가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을까.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비운에 간 최영 장군은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와의 사이에 아들 담(潭)을 남겼다. 그 후손들은 조선왕조와는 인연을 멀리하고 전국의 산야에 묻혀 숨어 지냈는데 500년이 넘도록 그렇게 지내온 것은 최씨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최영의 요동 정벌이 성공했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고구려의 옛 땅을 찾아 지금쯤 만주와 간도 일대가 우리의 영토로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강성 민족이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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