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여수 밀수사건(광주일보)
75년 여수 밀수사건(광주일보)
  • 관리자
  • 승인 2004.01.3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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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 7일, 한반도의 최남단 항구 여수. 대검찰청 특수1과장 김병리 검사가 이끄는 일단의 수사팀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행적은 완벽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6·25 월남 피난민 출신인 김 검사는 당시 검찰이 자랑하던 베테랑 특수통이었다. 동국대 법대를 나온 김 검사는 고시에 합격하기 전 경찰(경감)을 지낸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김 검사는 당시 49살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검찰 출신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낸 김양균 변호사는 “같이 근무한 적은 없지만 한번 손대면 끝을 보는 검사,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한길만 가는 사람으로 검찰 안에 알려져있다”고 말했다. 당시 여수밀수사건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깡마른 인상에 날카롭고 꼬장꼬장한 스타일이었다”고 평했다.
호남 근무 경험이 전혀 없는 김 검사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 큰 파문을 던진 두건의 대형사건 수사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여수밀수사건 외에 그가 담당한 사건 중 하나가 71년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목포 삼학소주 탈세사건이다. 삼학소주는 결국 이 사건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73년 문을 닫았다. 김 검사는 목포와 여수, 전남의 양대 항구에 의도하지 않은 악명(?)을 남긴 셈이 됐다.
이로부터 4일 뒤인 9월 11일. 김치열 검찰총장은 남해안 일대의 해상밀수조직에 대한 일망타진을 전국 검찰에 공식 지시했다.
김 총장의 `공개적인 밀수 척결'' 지시 이전에 이미 수사는 착수된 셈이다. 여수 뿐 아니라 우리나라 해상밀수의 대표적 도시 부산에도 이미 검찰의 칼날은 겨눠진 상태였다. 부산에는 또 다른 특수통 석진강 검사(대검특수부 제3과장)가 파견됐었다.대검 특명반은 반장인 김 검사를 비롯, 대검 수사관 10여명과 광주지검, 순천지청 수사팀으로 구성된 매머드급이었다. 광주지검 전팔현 검사도 가세했다.
수사본부는 여수시 수정동 여수 신항에 위치한 여수세관에 차려졌다. 세관 안에 있는 보세창고 두개는 임시 유치장이 됐다. 수사기간동안 100여평 남짓의 넓은 창고 두개에는 항상 10여명씩의 밀수 용의자와 각종 비리연루자들이 붙잡혀 있었다. 붙잡혀온 사람들은 하루종일 콘크리트 바닥에 꿇려있다가 수사관들에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밀수사건을 겪었던 여수 사람들은 지금도 `검사 김병리''를 `저승사자''로 부른다. 법 절차에 따른 정당한 법 집행보다 `밀수 척결''이라는 정권 차원의 군기잡기가 훨씬 먹혀들어가던 시절, 검찰 특명반의 위세는 대단했다.
직접 수사대상인 밀수·폭력조직은 물론, 여수시청, 경찰서, 세관, 해운국(현 해양항만청) 등 관가는 숨을 죽였다. 여수시청의 양곡·비료 등 `돈이 될만한 행정''도 모조리 까발려졌다. 심지어 여수지역 기자들이 머리기름(포마드)을 바르고 다녀도 `밀수 비호세력''으로 몰릴 판이었다.
특명반과 함께 여수에 도착한 중앙일간지·방송은 연일 `여수시민의 절반이 밀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식으로 과장 보도해댔다. 인구 13만명의 여수시민들은 고장을 매도하는 보도에 분노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특명수사의 위세는 시민들을 침묵과 공포로 몰아갔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여수·부산을 겨냥한 밀수 소탕이 벌어졌을까. 직접적인 도화선은 한여름 여수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이 계기가됐다.
수사 착수 한달 전인 8월 5일 오후 5시께. 여수세관 감시과 조사실에 25살의 청년 강석범이 흥분한 채 들이닥쳤다. 이틀전 밀수사건 용의자로 세관에 잡혀온 제7삼향호 선주 강형환(당시 54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강석범은 흥분한 목소리로 세관 직원들에게 항의했다. `밀수와 관련이 없는데도 억지자백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고문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강석범이 품고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칼을 본 수사계 직원 서정휴(당시 34세)는 45구경 권총을 빼내 공포 5발을 쐈다. 이순간 강석범이 칼을 휘둘렀다. 결국 서정휴가 칼에 찔려 숨지고 세관 직원 신모 등 3명도 상처를 입었다.
사건 이틀전인 8월 3일 밤. 여수세관에 한통의 전화 제보가 접수됐다. 굴껍질과 쥐고기를 싣고 일본 하가다에 간 제7삼향호가 4일 새벽 귀항하면서 카세트 300개, 녹용 등 싯가 500만원어치를 밀수입한다는 정보였다. 여수세관은 선주 강씨를 비롯, 선원 8명을 연행해 조사했지만 밀수품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터진 세관원 살해사건은 여수를 무법천지의 밀수 도시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살해된 서정휴의 빈소에 민간인 조문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또 여수 시민 600여명 이름으로 살인범 강석범의 선처를 요구하는 대담한(?) 진정서까지 제출될 정도였다. 밀수·폭력조직의 위세도 위세지만 밀수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직간의 암투에서 수사가 시작됐다는 설도 유력하다. 당시 여수에 있던 밀수조직은 대략 5~6개파. 원래 같은 계열이었던 허봉용파와 강동원파가 갈라지면서 밀수로 얻어진 이익을 놓고 암투가 벌어졌다가 어느 쪽에선가 상대를 청와대에 투서했다는 추측이다.
`올것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여수항의 밀수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경찰·세관·해운국이 한통속이 되서 돌아가는 데다 검찰도 조무래기만을 잡아 넣는 식으로 썩어가면서 여수 사회 스스로가 대검의 수사를 부른 격이라는 얘기다.
특명반은 여수 도착 5일만인 12일 1차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특명반은 여수항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밀수를 해온 5~6개파 40여명의 계보를 파악하고, 1차로 속칭 갈매기파 두목 박동화(당시 45세), 흑해공사 대표 오세원(당시 40세), 거창호 선주 강동원(당시 37세), 우천석(당시 30세) 등 4명을 관세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또 거물급 밀수자금조달책인 허봉용(당시 46세)을 비롯, 전직 형사 이상준(당시 45세) 등 10여명의 두목급과 운반담당 18명, 외항선을 상대로 한 브로커 12명 등 모두 40명을 수배했다. 75년 여수밀수사건과 동의어로 불리우는 `허봉용''이라는 이름이 수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허봉용 등 주요 인물들은 수사 착수 정보를 입수하고 잠적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2004년 01월 28일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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